북제 문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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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제 문선제(526년 ~ 559년)는 북제의 초대 황제이다. 그는 동위의 권신 고환의 둘째 아들로, 형 고징의 사후 혼란을 수습하고 동위 효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550년에 북제를 건국했다. 즉위 초에는 정치 개혁과 경제 발전에 힘썼으나, 말년에는 주색에 빠져 폭정을 일삼았다. 그는 유능함과 폭군적인 면모를 함께 가진 이중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후 북제는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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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6년 출생 - 원조 (북위)
원조는 북위의 황제였으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영태후에 의해 옹립되었다가 이주영에 의해 폐위되어 호태후와 함께 익사하며, 그의 삶은 당시 북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 559년 사망 - 양원왕
양원왕은 고구려의 24대 왕으로, 안원왕의 아들이며 왕위 계승 과정에서 내분을 겪었고, 재위 기간 동안 외침과 내정 불안, 신라의 공격에 대비한 장안성 건설 등의 어려움 속에서 국력이 쇠퇴하였다. - 559년 사망 - 진패선
진패선은 남조 양나라의 장군으로 후경의 난을 평정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진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이며,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국가 기틀을 다지고 북제의 침공을 막아내는 등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 남북조 시대의 상서령 - 고징
동위의 권신이자 북제의 추존 황제인 고징은 고환의 장남으로 아버지 사후 승상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으나, 암살당한 후 아들 고양에 의해 북제 건국 후 문양황제로 추존되었다. - 남북조 시대의 상서령 - 독고신
독고신은 수려한 용모와 기마술로 이름을 떨친 남북조 시대 서위의 무장이자 관료이며 북주 팔주국 중 한 명으로, 세 딸이 각각 북주, 당, 수나라 황후가 되었으나 권력 다툼으로 우문호에 의해 자진했다.
북제 문선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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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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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북제 문선제 |
한자 표기 | 北齊文宣帝 |
성 | 고(高) |
휘 | 양(洋) |
출생 | 526년 |
사망 | 559년 11월 25일 (32–33세) |
묘소 | 무녕릉(武寧陵) |
재위 | |
즉위 | 550년 6월 9일 |
퇴위 | 559년 11월 25일 |
연호 | 천보(天保) |
연호 기간 | 550년 6월 9일 – 560년 2월 12일 |
가계 | |
아버지 | 고환 |
어머니 | 무명황후 |
배우자 | 소신황후 |
자녀 | 고은 고소덕 고소의 고소인 고소련 장락공주 중산공주 의녕공주 |
칭호 | |
묘호 | 현조(顯祖), 한때 위종(威宗) (565–570) |
시호 | 문선황제(文宣皇帝) ("문명하고 책임감 있는"), 한때 경렬황제(景烈皇帝) ("결정적이고 성취적인") (565–570) |
2. 생애
고환의 둘째 아들 고양은 형 고징이 란경(蘭京)에게 살해되자 그 뒤를 이었다. 고양은 란경을 주살하여 형의 원수를 갚고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동위(東魏) 효정제(孝静帝)에 의해 승상이 되어 제왕으로 봉해졌으나, 550년 효정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제위에 올라 북제를 건국했다.[9] 552년에는 중산왕으로 강봉된 효정제를 세 아들과 함께 살해하고, 원씨(元氏) 일족을 모두 살해했다.[10]
즉위 초, 고양은 양음(楊愔)을 등용하여 부국강병 정책을 실시하고, 농업, 염철업, 요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북제를 단기간에 성장시켰다. 군사적으로는 유연(柔然), 거란(契丹), 고구려 등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무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사치를 부리고, 한족(漢民族)을 대량 살해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559년, 고양은 북위의 구 황족인 원소(元韶)에게 한 왕조의 중흥 이유를 묻고, 그해 5월 원씨 일족과 북위 시대 고관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11][12] 이로 인해 721명이 사망하고 시체는 장수(漳水)에 버려졌으며, 이후 업(鄴) 사람들은 오랫동안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13] 이러한 부패한 생활로 인해 고양은 34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했고, 그의 사후 북제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2. 1. 초기 생애
고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정실 부인 루소군(婁昭君)이다. 북위(北魏) 효무제(孝武帝)의 황후 고씨, 고징(高澄), 동위 효정제(孝静帝)의 황후 고씨 (태원장공주), 고연(高演) (효소제), 고담(高湛) (무성제), 고제(高済)(박릉왕)와는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이다.[9]고양(高洋)은 526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 고환은 북위의 최고 사령관 이주영 휘하의 장군이었다. 어머니 누소군은 고환의 아내였으며, 고양의 초기 경력은 그녀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했다. 누소군은 부유한 선비족 가문 출신이었다.[7] 그는 형 고징 다음으로 둘째 아들이었다. 530년 이주영이 사망한 후, 고환은 이주 가문을 전복시키고 북위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534년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에는 동위를 통제하는 실질적인 권력이 되었다. 535년에는 태원공(太原公)에 봉해졌다.
고양은 어릴 때 대인관계 기술이 서툴고 때로는 발달 장애를 겪는 것으로 여겨져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형에 대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이런 모습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실제로는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환이 엉킨 실뭉치를 풀게 하여 아이들의 지능을 시험하려 하자 칼을 꺼내 실뭉치를 잘라내며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고환의 아들들이 성장하면서, 어느 날 고환은 장군 팽락(彭樂)에게 그들을 상대로 모의 공격을 하도록 하여 군사적 능력을 시험하려 했다. 형 고징을 포함한 고환의 모든 아들들이 두려워했지만, 고양은 침착하게 반응하여 팽락을 사로잡았다. 성장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어색하고 지능이 부족한 것처럼 보였으며, 특히 고징은 그를 종종 얕잡아보았다.
547년 고환이 사망한 후, 이미 동위 황실 정부의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던 고징이 섭정으로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는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고, 동위 효정제가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음모를 알아내어 효정제를 사실상 가택 연금했다. 그 후 스스로 황위에 오를 계획을 세웠지만, 549년 수도인 업성(鄴城, 현재의 한단시, 허베이성)에서 관료 진원강(陳元康), 최계서(崔季舒), 양음과 함께 황위에 오르는 절차를 논의하던 중, 부당한 대우에 분노한 하인 난경(蘭京)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고양은 업성에 있었고, 재빨리 경비병을 소집하여 난경과 공모자들을 죽였다. 그는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고징의 죽음을 즉시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 2. 동위 섭정
549년 가을과 겨울, 양나라에서 후경의 반란으로 내분이 일어나자, 고양은 팽락을 보내 양나라 변경 지역을 공격하여 회하와 양쯔강 사이 지역을 장악했다.[9]550년 봄, 고양은 동위 효정제로 하여금 자신에게 제기군왕이라는 작위를 내리게 했다. 두 달 후, 그의 작위는 제왕으로 바뀌었다.[9]
550년 여름, 고덕정(高德政), 서지재(徐之才), 송경업(宋景業) 등의 조언에 따라, 고양은 황위를 찬탈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진양(晉陽, 현재의 산시성 타이위안시)에서 예성으로 향했지만, 평도(平都, 현재의 산시성 진중시)에 도착했을 때 관리들이 황위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무시하는 척하자, 다시 진양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효정제로 하여금 그에게 구석을 하사하는 조서를 내리게 하여 황위를 찬탈하려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드러냈다. 그 후 그는 다시 예성으로 향했고, 효정제는 그에게 양위하여 북제를 건국하였으며, 고양은 황제가 되었다.[9]
2. 3. 북제 건국과 통치
고환의 둘째 아들 고양은 형 고징의 뒤를 이어 혼란을 수습하고 그 여세를 몰아 동위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9]당시 화북은 군사력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고, 경제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북제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돌궐과 결탁해 거란을 제압하고 북주를 여러 번 격퇴하였다.
처음에는 고조(高祖)라는 묘호를 올렸다. 북제 문선제 치세 초반에는 그는 특히 군사 문제와 같이 중요한 국가 사안에 세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동위의 법률을 개정하고, 선비족과 한족 출신의 정예 병사들을 선발하여 국경 방위군을 구성했다. 세금과 노동의 부담을 평등하게 하기 위해 그는 통치하의 가구를 부의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부유층은 더 많은 세금을 내고 빈곤층은 더 많은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했다. 아버지 고환과 형 고징이 세운 흐름을 이어받아 그는 엽성과 진양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고, 진양을 사실상 두 번째 수도로 만들었다.
아버지 고환과 마찬가지로 문선제는 자신을 중국인보다는 선비족으로 여겼다. 더욱이 그는 아버지보다 더 중국 전통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덕정(高德政)과 다른 관료 고륭지(高隆之)는 문선제의 사촌이자 강력한 장군인 단소에게 아첨하려 했고, 단소의 누이 단씨 부인을 문선제의 후궁으로 삼아 황후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문선제는 그들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고, 예상되는 규범에 따라 그의 아내 이조애 공주를 황후로 삼았으며 그의 아들 고은을 태자로 삼았다.
북제의 건국에 대응하여, 라이벌 서위의 최고 장군 우문태는 북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문선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우문의 공격에 맞섰다. 우문은 문선제의 군대가 잘 조직된 것을 보고 "고환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탄식했다. 그는 문선제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이 작전에서 북제에게 몇몇 변경 지휘소를 잃었다.
552년 새해 무렵, 문선제는 전 황제인 중산왕을 죽이려 했다. 그는 먼저 여동생이자 왕의 부인인 태원 공주를 잔치에 초대했다. 그녀가 왕의 집을 떠나자마자 그는 자객을 보내 왕에게 독약을 마시게 했고, 그의 세 아들 또한 살해했다. 그는 전 황제를 황실의 예우로 장례를 치렀지만, 나중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전 황제의 관을 파내어 엽성 근처를 흐르는 장강(漳水)에 던져 넣었다.[10]
552년 봄, 문선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막계 부족(상요하 유역)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또한 551년에 한나라 황제를 자칭했지만 552년에 양나라 원제에게 패배한 후경과 싸움을 벌이던 양나라와 국경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장군들을 보냈다. 양나라 도시 점령 작전은 후경이 패배한 후에도 계속되었지만, 그는 이때 양나라에 대한 단독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다. 작전은 552년 겨울에 끝난 것으로 보이며, 문선제는 실제로 양나라 장군 왕승변과 진패선에게 양나라 영토의 동쪽 절반을 책임지도록 한 원제에게 광릉(廣陵, 현대 강소성 양저우)과 여양(歷陽, 현대 안휘성 차오후)을 돌려줄 것을 약속했다.
552년 겨울, 문선제는 직접 진양에서 군대를 이끌고 여석(離石, 현대 산서성 뤼량)으로 갔고, 서위와 돌궐에 대비하기 위해 황로령(黃櫨嶺, 역시 현대 뤼량)에서 섭평수(社平戍, 현대 산서성 신주)까지 만리장성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553년 겨울, 거란족이 북제의 북쪽 국경을 공격했고, 문선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거란을 공격했는데, 이 작전에서 그는 위험에 직접 노출되어 거란을 물리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같은 해 겨울, 문선제는 북제에 우호적인 황제를 양나라 왕위에 앉히고 싶어, 548년에 동위에 항복한 원제의 사촌 소퇴(蕭退)를 양나라 영토로 호송하기 위해 곽원건(郭元建)이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북제군은 양나라 장군 후전(侯瑱)에게 패배했고, 소퇴는 엽성으로 돌아왔다.
554년 새해 무렵, 당시 멸망 직전에 있던 유연의 잔당은 돌궐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북제에 항복했다. 문선제는 직접 돌궐을 공격하여 군대를 물리쳤고, 위율려 안락진을 유연의 새로운 칸으로 임명하고 유연족을 북제 영토 내에 정착시켰다(마읍(馬邑, 현대 산서성 숴저우)).
554년 봄, 문선제는 고위 장군 흘률금(斛律金)과 그의 동생 고연 창산왕의 도움을 받아 산호(山胡) 부족(현대 뤼량)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승리 후 그는 산호의 11세 이상 남성은 모두 학살하고 여성과 어린 남성은 병사들에게 전리품으로 하사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지휘관 중 한 명이 그의 부관 여휘례(路暉禮)가 그를 구하지 못해 죽자, 문선제는 여휘례의 내장을 몸에서 꺼내 병사들이 먹도록 명령했다. 북사의 저자 이연수와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을 포함한 많은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문선제의 통치의 전환점으로 보았다. 그 이후 그는 폭력적이고 변덕스럽게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 4. 말년의 폭정과 죽음
高洋|고양중국어은 술을 많이 마시고 부도덕한 생활을 하며, 자신의 변덕에 따라 잔혹하고 야만적인 행동을 했다.[8] 그는 때로는 밤낮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때로는 머리를 풀고 다채로운 띠를 두른 야만인의 옷을 입거나, 몸을 드러내고 화장을 하기도 했다.[8] 안장을 사용하지 않고 당나귀, 소, 낙타, 코끼리를 타기도 했고, 때로는 최기숙이나 유도지(劉桃枝)에게 자신과 큰 북을 들고 다니며 북을 치게 했다.[8] 귀족과 황실 관리들의 사저에 기습적으로 들이닥치거나, 거리를 가로질러 다니며 길에 앉거나 잠을 자기도 했다.[8] 따뜻할 때는 옷을 벗고 햇볕을 쬐기도 했지만, 추운 겨울에도 옷을 벗고 돌아다녔다.[8]한 번은 길거리의 여자에게 "천자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는데, 그 여자가 "그는 너무 미쳐서 정말 천자라고 할 수 없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녀의 머리를 베었다.[8] 또 한번은 술에 취해 비합리적으로 행동했을 때, 그의 어머니 뇌태후가 그를 꾸짖자, 그는 그녀를 늙은 야만인과 결혼시키겠다고 협박했다.[8] 뇌태후가 화를 내자 그는 그녀의 자리 아래 기어갔지만, 그 자리를 뒤집어 그녀가 부상을 입었다.[8] 술에서 깬 후 그는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큰 불을 질러 뛰어들어 죽으려 했고, 그녀는 그를 붙잡아 구해야 했다.[8] 그는 그 후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10일 동안만 그렇게 할 수 있었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8] 그는 또한 이씨 황후의 어머니 최씨 부인에게 화살을 쏘고 채찍질했다.[8]
558년, 문선제는 여러 차례 간언을 해온 셋째 동생 영안왕 고준과 조정 참예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치려던 일곱째 동생 상당왕 고환을 감옥에 가두고, 그 후 불을 질러 처형했다.[18]
559년 설 무렵, 문선제는 감옥에 갇힌 고준과 고환을 방문했다.[18] 그는 처음에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풀어줄 것을 고려했지만, 또 다른 형제인 창광왕 고참의 간청에 따라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창으로 찌르기 시작했다.[18] 그는 또한 횃불을 던져 그들을 불태워 죽이도록 명령했다.[18]
559년 여름, 문선제는 북위 황실 원씨 가문이 결국 권력을 되찾으려 할 것이라고 의심하여,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원씨를 학살하고 시신을 장강에 버리도록 명령했다.[12] 특히 원황두라는 사람은 문선제의 실험의 일환으로 연에 묶여 탑에서 날려 보내졌는데, 이것이 최초의 인간 비행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고씨와 특히 친했던 몇몇 가문만이 살아남았다.
559년 가을, 문선제는 역사학자들이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것으로 믿는 심각한 질병을 앓았다. 그는 이씨 황후에게 "사람은 살고 죽는 것이며, 아들 고은이 아직 어리고 다른 사람이 그의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 외에는 후회할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고연에게 "어서 왕위를 차지하고 그를 죽이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계승 순서를 바꾸지 않았고, 그의 죽음 후 고은은 폐제로 즉위했다. 관리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려 했지만, 양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실제로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연은 양인을 죽이고 고은을 폐위하고 황제가 되었다.
3. 가족 관계
구분 | 이름 | 비고 |
---|---|---|
조부 | 고수생 | 문목황제(文穆皇帝) |
조모 | 한기희 | 문목황후(文穆皇后) |
부친 | 고환 | 고조(高祖) 신무황제(神武皇帝) |
모친 | 누소군(婁昭君) | 무명황후(武明皇后) |
형제 | 고징 | 제왕 |
형제 | 고연 | 효소제 |
형제 | 고담 | 무성제 |
형제 | 고제 | 박릉왕 |
자매 | 고씨 | 북위 효무제의 황후 |
자매 | 고씨 | 동위 효정제의 황후 (태원장공주) |
자세한 배우자와 자녀 목록은 각각 황후, 후궁, 황자, 황녀 문단을 참조하면 된다.
3. 1. 황후
3. 2. 후궁
3. 3. 황자
순번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비고 |
---|---|---|---|---|---|---|
1 | 황태자 | 고은 | 545년 ~ 561년 | 황후 이조아 | 제2대 황제 (폐제) | |
2 | 태원왕 | 고소덕 | 546년 ~ 562년 | 황후 이조아 | ||
3 | 범양왕 | 고소의 | 세류 풍씨 | |||
4 | 서하왕 | 고소인 | 빈 배씨 | |||
5 | 농서왕 | 고소렴 | 553년 ~ ? | 홍덕부인 안옥광 |
3. 4. 황녀
소신 황후와의 사이에서 장녀 고보덕(高寶德)을 낳았으며, 장락공주(長樂公主)로 책봉되었다. 장락공주는 장락왕(長樂王) 울세변(尉世辯)에게 하가했다.[25] 설빈(薛嬪) 소생의 황녀도 있었으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4. 평가
북제의 창시자로서 유능했다고 할 수 있지만, 끈질김과 잔혹함, 그리고 사인(死因)이 된 주색(酒色)에 빠진 것이 결점이었으며, 그 기세로 신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유능함과 폭군적인 요소를 함께 갖춘 이중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5. 연호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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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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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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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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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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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宮崎
[15]
서적
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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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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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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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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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隋書
[20]
문서
태원군공부인(太原郡公夫人)/제왕비(齊王妃)/가하돈황후(可賀敦皇后)/황태후(皇太后)/소신황후(昭信皇后)/문선황후(文宣皇后)
[21]
문서
서조빈(西曹嬪)/농서태비(隴西太妃)
[22]
문서
제남민도왕(濟南愍悼王)
[23]
문서
광양왕(廣陽王)
[24]
문서
장락왕(長樂王)
[25]
문서
중산공주(中山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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